우주의 주인은 누군가
법회명 : 무량법회 법 사 : 법산스님 법회일자 : 2005-02-23
 
유물선천지(有物先天地) 무형본적요(無形本寂寥)
능이만상주(能以萬象主) 불축사시조(不逐四時凋)
한 물건이 있으니 천지가 일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이 물건은 형상이 없으니 본래 고요하고 고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능히 우주만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무리 지나가도 그를 쫓아 시들지 않더라.

본래 하늘과 땅이 시작되기 전에 한 물건이 있었다면 그 물건은 어떤 물건이며, 물건이라고 하였다면 어째서 모양도 색도 소리도 없으며 냄새도 맛도 없는 것인가? 그러면서 그 물건이 세상만사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는 그 한 물건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그리고 차도(此道)하라 시심마물(是甚摩物)이요? - 일러라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던져주는 의심이다.

오늘(음/1.15)은 전국의 선원에서 스님들이 지난 10월 보름부터 석 달간 참선하면서 본래의 모습과 본래의 면목인 그 한 물건을 찾기 위해 하였던 정진을 해제하는 날이다. 그래서 오늘은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부처님께서는 보름을 중요시 하셨다. 남방불교에서는 부처님의 탄생일을 4월 8일이 아닌 4월 15일 즉, 보름이라고 한다. 조각달이 아닌 완전한 형태를 갖춘 만월에 태어나셔서 삼라만상을 은은히 비춰주시는 분이시며, 출가도 보름에 하셨고, 득도도 그러했고 열반도 그러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4월 8일에 태어났고 출가는 2월 8일에 했으며, 성도는 12월 8일이며, 열반은 2월 15일이었다고 믿고있다. 이는 전달과정에서 변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다. 우리의 본래 모습을 찾지 못하면 이 세상과 더불어 할 수 없다. 그래서 만약 본래의 모습과 융통하지 못하면 안된다. 본래의 모습과 융통할 수 있다면 이것은 곳 신선중의 신선이요 하늘 중에서 가장 훌륭한 하늘이다.
그러니 대자유인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걸릴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않는 이유는 바로 집착이다.
이러한 본래의 모습을 찾는 말씀을 비유로
“콧구멍이 없는 놈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이 어찌 그림이 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콧구멍 없는 놈이 그린 그림을 부처님의 눈으로 본들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을 이론으로 논한다면 이것은 이치에는 맞다 할지는 모르지만 만급에 당나귀는 말뚝에 묶여있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말로 푼다는 것은 당나귀 말뚝에 스스로 묶인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늘 세상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우리는 쫓기지 않고 깨침을 내 마음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불교를 믿고,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를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중기도를 할 때 화엄성중(華嚴聖衆)을 염한다. 화엄성중이란 불법을 옹호하는 여러 신(神)들이다. 그 신들의 수는 104위 신장(神將)인데, 숫자로써의 104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100이란 가득찬 수이며, 4는 네 방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외우는 천수경에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오방(五方)이란 동, 서, 남, 북의 네 방위와 가운데를 가리키는 중방(中方)이 합하여 오방이 되고, 그기에 안과 밖이 합쳐져서 주위의 환경과 주변의 세계를 두루두루 말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이 평안해지기를 바라는 진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중기도는 천수경을 하게 되면 항상 하고있는 것이다. 정월부터 내 마음이 편안하고 가정이 편안하고 사회가 편안해야 우리가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월부터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부터 심기를 바로 갖자는 것고, 자기 마음의 신인 나의 정신을 올바로 갖자는 것이 화엄성중을 찾는 신중기도의 의미인 것이다.
화엄이라는 것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뜻하는 것인데, 화엄에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온갖 세계의 여러가지 모습과 갖가지 중생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속에 우리는 더불어 살고있다. 내 생명도 모든 생명과 함께 더불어 살 때에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지 어떠한 생명이라도 나쁘게 생각하고, 시비하면 불안해지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대게 상대는 가만히 있는데 스스로 불안해져서 싸움을 거는 것이다. 싸움을 거는 것은 그 불안함을 없애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이 있어 자랑을 해도 그 힘은 힘이 빠지면 곧 사그러들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무쇠덩이라 하더라도 그 무쇠를 녹이는 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화롯불이다. 또 그 화롯불 마저도 오래지 않아 사그러들어 재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권력을 가지고 있어 휘두를 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베어낸 나무가 자신을 녹일 수 있는 화롯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본래 이 세상에 모든 생명은 다 귀중하고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본심으로 돌아가서 본심으로 본다면 귀하지 않은 것이 없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업력에 이끌려 행세를 하려 하고 욕심을 채우려 든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주인이란 낱낱의 생명이다.
혜능스님께서 말씀하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에서도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가 끼일 것이 있는가? 라는 말도 본심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참선을 할 때 “부모미생전(夫母未生前)의 소식을 찾으라”고 한다. 이 말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나의 본 모습을 찾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말로 하는 즉시 잘못된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있다, 없다는 것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그러나 나에 얽매이게 되면 그 얽매임과 동시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오온(五衆)이 다 공(空)하다’하여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였고, 또 공하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얻으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다. 얻을것이 없으면 무가애(無 碍)라,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무가애가 아니면 걸리기 때문에 걱정근심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참선해서 방하착(放下着)하라는 것은 자기의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내 것 이라 생각하면 그때부터 집착이 생긴다. 본래 내 것이란 없다. 본래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있는 대로 나누어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주어버리면 또 생기기 마련이다.
맺어진 인연을 자신에만 치우쳐서 생각하지 말고 나를 버리는 방하착을 해야 나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내 것이라는 집착이 생기면 자신을 다스릴 수 없다. 덜고 집착을 떠나게 되면 마음이 고요하고 가벼워지며 몸도 건강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주인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불성의 자리 그 자리인 것이다. 불교를 잘 믿고 해탈을 얻어서 이 우주의 주인이 되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고, 스스로도 행복할 수 있는 부처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