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사욕쟁이할매,화곡동보살2편-염염 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밥상의 처처(處處)가 성찬이라
    이 름 : 이 보현 등록일 : 201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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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밥상의 밥상의 처처(處處)가 성찬이라~


절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잠잘 곳도 변변치 않아 천막을 짓고 살던 시절을
화곡동 할매는 이른바 ‘천막법당 시절’로 회상하곤 한다.


끼니때면 동네 구멍가게에서 쌀을 받아와 밥윽 짓고,
시줏돈이라도 들어오는 날에는 저녁때를 기다려 회주(정우)스님과
장에 나가 시든 채소를 사와 찬을 만들곤 했던 시절,


그토록 어려웠던 시절을 건재하게 버텨낼 수 있었던건,
부처님의 가피와 도반 같은 아이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생이 여장부인 할매의 타고난 성품과 팔팔한 기운 덕이 아니었을까,



♣ 무량하게 끌어안고 여린 모정


유목민의 살림처럼 천막을 짓고 살던
천막법당 시절 이래로 25년간을 한결같이 구룡사의 공양 간을 지키며
절집 식구들의 끼니를 책임져온 화곡동 할매,
이제 그이는 팔순이 다 되었다.

하지만 일명 ‘욕쟁이 할매’로 통할 만큼 걸쭉한 입담과
타고난 여장부의 기질은 여전히 건재하기만 하다.

“아니 방이 왜 이렇게 뜨거운 겨? 더워 죽겄네, 누가 또 불을 키웠간? 막내, 네가 키웠간?
아까 내가 분명히 온도를 맞춰놨는디....”

“몰라요, 누가 켰는지..... 아, 아까 누가 방이 많이 차다고 해서 켰던 것 같아요,”

“이런, 요즘 살기가 얼메나 힘든 세상인디 보일러를 팍팍 돌리는 겨!”

공양간 한 귀퉁이에 딸린 방에서 TV를 시청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던
공양간 보살들에게 화곡동 할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온돌방의 뜨근한 기운에 추위에 언 몸이 노근노골해져 좋기만 한데,
비싼 연료비는 걱정도 없이 찜질방마냥
보일러를 돌리는 게 할매는 영 못마땅한 모양이다.

하기야 쌀을 넉넉히 살 돈도, 싱싱한 찬거리를 마음 놓고 살 돈도 없던
천막법당 시절을 생각하면 여간 호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운께 따습게 입고나가, 목도리도 칭칭 돌려 메고…….”


깐깐한 성격에 거친 입담의 할매라도 속 깊은 정은 연륜만큼이나 녹아있는 법,
방금 전의 호통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할매는 공양을 준비하기 위해
웃옷을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하는 막내 보살에게 살가운 잔소리를 챙겨준다.


한편 화곡동 할매와 한 고향의 이웃이면서 친자매처럼 지내온 아흔을 바라보는 노보 살님은
“좀 덥기는 허네. 그래도 뜨듯하니 괜찮구먼,” 이라며 남도 특유의 투박하면서도
푸근한 말투로 화곡동 할매의 장단을 맞추는 듯 하면서도 은근슬쩍 분위기를 중화 시켜본다.

한 고향에서 정을 나눈 것도 모자라, 서울로 올라와서는 천막 법당시절 이래
더욱 호형호제하며 지내다보니, 노보 살님이나 화곡동 할매나
서로의 표정이나 말투 하나만으로도 속내를 읽어내는 사이가 되었다.

화곡동 할매의 화통하고 분명한 성품에 반해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노보 살님은 회주스님의 모친이기도 하다.

근처 딸네와 절을 오가며 지내는 노보 살님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면서도 든든한 도반으로 친동생과 다름없는 화곡동 할매의 곁을 함께 한다.

화곡동 할매가 양(陽)의 기질이라면 노보 살님은 음(陰)이라,
그렇게 서로 상보(相補)하고 상응(相應)하며 정을 나눈 세월이 40년이 되어간다.

“처음 천막법당 할 때 저 사람(화곡동 할매)한테 도움을 청해 여기서 일 년 함께 있었지,
옛날에 회주스님이 출가할 때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난 바람에 내가 병이 생겼네,
그래, 어린 나이에 출가한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부렸으니
생사를 몰라 먹도 않고 잠도 못자고 밤낮 울기만 했지,”

스님인 한 친척의 영향으로 일찍이 출가 의지를 강하게 굳혔던 회주스님은
집안의 반대를 우려해 어느 날 말도 없이 집을 떠났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부모의 반대가 완강하면 중도에 출가생활을 접게 되는 경우는 왕왕 있었던 터라,
스님은 모진 결심으로 집을 떠났고 중간에도 부모님께 소식을 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식의 생사조차 모르고 살다 스님의 출가소식을 알게 된 것은
7년이 지나 동네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였다.

“동네 절에서 성지순례를 간다고 하길래 따라가려 했더,
약한 몸으로 먼데까지 갔다 병날까 싶어 어머니가 못 가게 하시더라고,
그때 조카며느리가 성지순례로 간 절에서 스님을 우연히 만나 알아보고는 사진을 찍어 왔는데,

처음엔 눈물이 어데로 달아났는가. 나오지도 않고, 어찌 커 부렸는가.
사진을 암만 봐도 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못 알아보겠더라고,
나는 몸뚱이가 반만 해져 따라 가보들 못했지만,
그 소식을 듣고 남편은 절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먼발치에서 몰래보고 왔었지,


학교에 다녀오면 나를 보듬고 몇바꾸쓱 돌면서 ‘엄니 냄새 좋기도 하다’고 했던 양반이었는데,
그런 정을 어찌 그리 다 떼 부리고 가부렸는가…… 그랑께 스님노릇을 한겨,
집에 있던 정을 갖고 있으며 지대로 못 하겄재…….”


그렇게 속세를 정을 단박에 끊어내고 출가를 했을 때나
어렵사리 천막 살이 포교활동을 했을 때나, 모정이란 스님이기 이전에는
자식의 선택을 묵묵히 바라보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무한하고 무량하게 끌어안기에는 육신의 힘이 벅차 지병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모정은 강하다고 하지만 그러한 힘은 실은 자식 앞에서 무너지는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한
또 다른 사랑법이라, 강인함 뒤에 숨겨진 여린 모정을 대신해 가나하고
힘들었던 천막법당 시절부터 강단있게 스님 곁을 함께해 온 이가 바로 화곡동 할매다.


♣ 회주스님 상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올린 특별한 찬

부모의 정을 뒤로하고 말없이 출가했고, 스승의 정을 뒤로 한 채
말없이 봇짐을 둘러메고 통도사를 떠났던 회주스님은
지금의 구룡사 터에서 맨주먹으로 불사를 해 도심지 포교를 시작했다.

이제는 미국과 인도에도 불사와 포교의 원력을 넓혀 제자들에게 일임한 회주스님은
몇 해 전 주지의 소임을 맡아 통도사로 돌아갔다.
천막법당 시절에는 말 할 필요도 없고,
군복무를 마치고 통도사로 돌아와 원주로 살림을 살던 시절도 있었기에,
스님은 절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고되고 중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더구나 공양간 일들은 수행과 다름없는 선업을 쌓는 일이라,
새해 법문에서도 스님은 공양 간에서 일하는 이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밥을 한 수저 먹는다고 배부르지는 않죠? 하지만 작은 양이라도
한 수저 한 수저 뜨다보면 배도 부르고 밥 한 그릇을 다 먹는 거여,
천릿길도 마찬가지잖소?
한 걸음 한 걸음 진지하게 걷다보면 천릿길에 도착하지요,


통도사 개울가에 가보면 돌이 얼마나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습니까?
그 엄청난 바위가 모난데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보세요.
우리가 먹고 쓰는 생활용수가 흘러가 그렇게 이쁘게 다듬어 놓았죠,,


또 밤새 눈 올 때보면 산중에서 툭툭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건 톱으로 자른 소리던가요? 도끼로 후려쳐 무너뜨리는 소리던가요?
아녜요, 솜털같이 미세한 입자의 눈송이가 쌓여 넘어뜨린 소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들 마음을 그처럼 어루만질 수 있는 힘은 무엇이던가요?
아마도 선근(善根)과 지혜가 합쳐진 자비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근을 잃어버리면 안돼요,
선근이 보리심이고 보리심이 선근이라…….


새해를 맞아 ‘My Way' 라는 팝송으로 이색적인 법문을 연 스님은
군복무 시절에 은사스님이 보내준 편지의 내용 중에서
’염염 보리심이면(念念菩리심)이면 처처안락국(처처안락국) ‘이라는 대목에서
깊은 사랑심을 느꼈더라는 경험담과 함께 선근과 보리심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한편 “후원 살림을 맡아 하시는 원주스님이나,
후원에서 찬물에 손 담그며 일하시는 분들과
봉사하는 분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라고 법문을 마무리했다.


그날 스님의 마음속에는 어려운 시절에도 굳건하게 곁에서 힘이 되어준
화곡동 할매와 깊은 속병을 앓으면서도 자식의 어떠한 선택도 포근한 눈처럼
무량하게 안을 수밖에 없었던 노보 살님에 대한 고마움이 자리 잡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한 마음은 이제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통하는 이심전심이라,
구룡사 공양간 한편에는 그처럼 오래된 회주스님용 밥상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전처럼 자주 펼 일은 없어졌으나 스님이 구룡사에 올라올 때면
그 상위로는 또한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소박한 제철 찬들이 올려진다.


“근디 아무거나 잘 잡숩지,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음식도 없어,
밤낮 풀이지 뭐, 김치에 나물에 순 그런 거여,”

먹는 것에 가림이 없고 워낙에 소탈한 입맛을 지녔기에
스님 상에 올리는 찬이라고 해봐야 대중과 별다를 것도 없고,
십 수 연간 밥상을 차려온 화곡동 할매조차 스님의 식성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붉은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스님의 밥상 위로
다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올린 찬이 있긴 하다,
다름 아닌 간장과 물김치다. 그 또한 스님이 유독 간장과 물김치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전통적인 관습에 의한 연유에서란다.

“옛날부터 어른들 상에는 간장이랑 물김치는 원래 기본으로 올리는 겨,
옛날 양반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수저로 간장부터 찍어 잡숩고 밥들 자셨거든,
물김치도 그렇고, 그래서 간장과 물김치는 일 년 내 안 떨어지게 담가야혀,”


회주스님 상에 올리는 남다른 찬이 기껏해야 간장과 물김치라니,
두 할매도 식성을 당체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슨 음식이든 맛나게 먹고
초라한 밥상도 푸지게 받는다는 스님의 타고난 밥맛 비결은 대체 무얼까?


스님의 새해맞이 법문에서 힌트를 찾는다면 혹여,
그냥 좋은 것도 아니고 너무나도 좋아 통도사의 산문에도
솟을 대문위에도 새겨 넣었다는 글귀 속에 있지 않을까......
‘염염 보리심’이면 처처안락국‘ 이듯,
염염(念念) 또한, 안락국마냥 맛나고 푸진 성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성 불교 2월호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