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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보현 님이 작성한 원본 ---------- ♣ 공양간의 신장 '화곡동 할매'와 밥상의 터줏대감들 ♣ 화곡동 할매가 구룡사 온지도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이야 소위 땅값 비싼 부자동네가 되었지만 25년의 전 구룡사가 지금의 터에 들어설 당시에는 지천이 논밭과 허허벌판으로 둘러친 황량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현재 구룡사의 회주인 정우스님은 통도사에서 올라와 작은 가정집 한 칸을 마련해 포교당 살림을 꾸려가다 그곳을 정리하고 이곳에 땅 한마지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가난한 살림이라 건물을 지을 돈이 없었기에 절에 맡겨진 아이들을 데리고 천막을 둘러치고 살았다. 이른바 '천막 법당'으로 일컬어지는 어렵던 시절 이래로 화곡동 할매는 그렇게 구룡사의 식구들과 질긴 인연을 맺었다. ♣ 천막법당 시절을 함께한 '숙성된' 인연들 ♣ "아고 말 도마, 처음에 정우스님이 절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데 한 3일만 봐 주소' 해서 손주딸을 들쳐 엎고 왔더니, 터만 조그맣게 파놓고 애들만 다글다글 한거여, 변변한 집도 없이 먼지구덩이 속에서 사는데 거지들이 따로 없는 거야, 스님이 양산 통도사의 암자에서 부터 인연돼 돌보던 아이들이 었는데, 3일만 봐 준다는 것이 일년이 되고 십년이 되가, 오늘까지 온 거지, 마음 속으로는 맨날 이번 불사만 끝나면 가야것다, 이번 불사만 끝나면 가야것다 했는데, 이렇게 길어질 줄 누가 알았누," 법당도 공양간도 요사채도 없어 천막을 둘러치고 살아야했던 어려운 시절 이래로 25년을 절의 신장처럼 구룡사의 살림을 지켜온 이가 화곡동 할매다, 할매의 집이 화곡동에 있어 회주스님이 '화곡동 보살님' 이라고 부른 바람에 '화곡동 보살님' 으로 불렸다는 그이는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나이도 무색하리만치 할매의 또 다른 별명인 '욕쟁이 할매' 로서의 솔직하고 거친 입담과 팔팔한 기운은 여전하다. "그런데 이젠 기운이 쇄해 지셨는가. 별로 그렇지도 않아요,"(웃음) 화곡동 할매의 보살핌 속에 자라 어른이 되고 출가를 해 이젠 구룡사 주지가 된 각성스님은 누구보다 할매의 성격과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 중 하나이다. 걸걸한 여장부의 성격과 입담에 가려진 할매의 속정은 실은 독안의 장맛처럼 구수하고 깊기만 하다. 그렇게 할매의 감춰진 사랑을 머금고 자란 많은 아이들이 부처님과의 인연 속에서 성장해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거나 성인이 되어 떠나가곤 했다. 그리고 더러는 회주스님의 상좌로 출가해 더욱 깊은 인연을 맺기도 했다. "출가를 한다고 하면 마음이 좋으면서도 아픈 거여, 어려운 스님생활을 잘 견디려나, 중간에 방황하지 않고 끝을 맺으려나 걱정이 되고, 머리깎고 가사 장삼입고 인사하러 올 때가 제일로 눈물이 나와, 우리 각성스님은 출가하고 보름을 혼자 기도를 했는데, 저녁밥 지어먹고 들어가 함께 기도하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기도 끝나고 나오면서 스님이 '할매, 나 잘 살게 걱정하지 마' 하면 또 눈물이 쏟아지고, 그땐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허리 아픈 줄도 모르겠고, 절을 해도 그렇게 가볍게 잘되고 기도가 잘 되는 겨," 잠시잠깐의 인연 속에 짧을 정을 나누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절에서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하며 할매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아이들은 자식이나 손주와 다름없다. 그러한 인연 중에 할매와 유독 정을 나눈 이가 성륜 스님이다, 할매는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우리 막둥이 성륜 스님이 최고야," 라며 찡끗 웃는다. 성륜 스님은 할매에게 친손자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얌전하고 말이 없는 성륜 스님이지만 구룡사에만 오면 할머니부터 찾고 끌어안으며 속정을 표현한다. "머슴아들을 키우다보면 오만 말썽을 안 부리겠나, 그럴 때면 모아놓고 호통을 치거나 매을 드는데, 성륜 스님은 매를 맞아도 절대 거짓말은 안 혔어, 누가 그랬는지 알아도 일절 말도 없고 참 착혀, 한번은 지그들끼리 모여 불장난을 했는데, 내가 불장난하는 놈 이마에는 '불'이라고 써 붙어있다고 했더니만, 우리 성륜 이가 손으로 이마를 가리는 겨, 그렇게 순진하고 착한디 그 마음이 또 본심이라, 그랑께 세 번씩 매질 할 걸 성륜 스님은 두 번밖에 안 때려지는 기라, 단체로 기압을 주려다보니 그렇지,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는 놈을 어찌 매질하겠누," 할매는 막둥이 스님이 처음 절에 왔을 때를 기억한다. 스님이 6살이 되던 무렵이었는데, 몸의 힘줄이 보일 정도로 삐적 말라있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보약을 한 첩 지어 먹었다고, 그랬더니 다른 놈이 갸만 약을 지어준다고 어찌나 땡강을 놓던지, 그 놈은 건강한데도 그냥 약을 지어먹인 적도 있었지, 간혹 말썽이 센 놈이 있어 회주스님한테 일일이 말은 못하고 파출소를 밥 먹듯 끌려간 적은 있었지만, 우리 애들은 하나같이 착한심이였어," ♣ 할매의 팔팔한 정과 기운이 담긴 고춧잎김치와 고추절임 ♣ 가지 많은 나무에 한시도 바람 잘 날 없었던 시절도 이제와 돌이켜보니 허허로운 미소와 그리움이 남는 훈훈한 날들이 되었다. 부처님이 가피로 버텨낸 그 시절을 회상해보면 아이들은 사실 할매에게 기운을 부추기게 한 도반 같은 인연들이었다. 천막 법당 시절에는 어린 식구들의 배를 곪지 않기 위해 할매가 할 수 있는 건 가난한 살림에도 끼니를 거르지 않고 밥을 짓는 일이었다. "실은 그게 가장 힘들었지 쌀살 돈이 없어 동네 구멍가게에서 한말쓱 받아다 먹고 살았는데, 아침에 한말 받아오면 점심때 해 먹일게 없는 거여, 애들 도시락 여덟 개 싸주고 나면 밥 한 솥이 기냥 없어지는데 환장하는 기라, 그러면 또 가게에 가서 한 두되 받아와 밥을 짓곤 했지. 그러다 누가 절에 시주라도 조금하면 그길로 회주스님하고 저녁에 가락시장엘 나가 다 팔고 남은 시든 채소를 사오는 기라, 돈이 없은께 좋은 놈은 못 사고 싼값에 찌꺼기를 사와 그걸 밤새 다듬어 반찬을 하는 기라, 거지생활이 따로 없었지, 그래도 그렇게 일 년 반을 고생하니깐 자리가 잡혀 가더라고," 회주스님은 원체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데다 그토록 어렵던 시절을 원력으로 버텨온 분이라 음식을 가리는 법이 없다. 스님이 통도사로 내려가기 전까지도 스님의 밥상은 대중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이 검박했다. 된장국에 김치와 간장 한 종지가 전부일지라도, 혹은 김칫국에 나물 한두 가지가 전부인 밥상일 지라도, 스님은 늘 푸짐한 밥상을 받는 듯 맛나게 공양을 들곤 했다. 어떤 찬이 특별히 맛있다거나 맛이 없다거나 하는 말도 일절 없는지라, 오랜 세월을 시봉했어도 회주스님의 식성에 대해 딱히 하는 바가 없다, 그러니 그 밑의 제자스님들이나 절집 식구들도 무슨 음식이든 내놓기만 하면 뭐든 잘 먹는다. “안줘서 한이지, 대중들 상에든 내놓기만 하면 뭐든 가리지 않고 좋아들 하지, 그런데 절지 반찬이라야 밤낮 풀이지 뭐, 국은 된장국하고 김칫국, 콩나물을 세 가지로 바꿔 끊이고 찬이라야 김치나 볶던지, 나물이나 무치던지 오이나 버섯이나 내놓던지 하는 거야,” 화곡동 할매의 공양간 철칙 중 하나는 어떤 음식이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해 먹이는 것이다. 물로 어떤 스님이 입맛이 없거나 몸이 아프거나 할 때는 예외로 두지만, 할매가 가장 예뻐하는 막둥이스님이 와도 누구든 구분 없이 똑같이 해먹여야 하는 할매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단다, “사실 음식은 장맛 하나만 확실하면 되는 겨, 우리 집 된장, 간장 한번 먹어봐, 얼마나 맛있는지……. 거기에 김치처럼 야채를 담가 사시사철 쟁여두고 먹으면 그걸로 든든한 거여,” 그러한 밑반찬 중에 할매가 일 순위로 꼽는 건 다름 아닌 고춧잎김치와 고추절임이다. 방법은 김치를 담글 때보다 간단하다. 고춧잎은 잘 다듬어 소금물에 담가 씻어 건진다. 여기에 풀을 끊여 넣고 조선간장과 고춧가루 넣고 비벼 깨소금으로 마무리하면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갓이나 깻잎을 담가도 좋다. 고추절임의 경우는 더욱 간단한데. 소금물을 짭짜름하게 농도를 맞춰 끊인 후, 손질해 놓은 고추에 붓는다. 한동안 숙성을 시킨 후에 고추의 빛깔이 누렇게 익으면 꺼내 먹기 좋은 크기로 썬 다음, 고추장에 엿물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이렇게 담근 고춧잎김치와 고추절임은 사시사철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든든한 밑반찬이 된다. “천막법당하며 살 때는 이런 밑반찬들도 귀했지, 인자는 흔하지만, 그때는 이런 거 구경도 못했어, 된장국에 김치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고 족했지,” 하지만 대중을 위한 원력의 힘은 기적과도 같아 어느덧, 구룡사는 그 일대의 중심이 될 만큼 큰 사찰이 되었다. 할매에게 있어 소금은 쌀만큼이나 귀중한 식재료의 원천인데 이젠 공양간 한 귀퉁이에 소금을 쌓아두고 먹을 만큼 넉넉한 살림도 살게 되었다. “장만큼 중요한 게 바로 소금이며, 소금을 창고에 저장해두고 한 사오년 묵혀두면 물이 쏙 빠지면서 꼬들꼬들해지거든, 우리는 소금을 곰수에서 사오는데, 한꺼번에 많이 사서 가마니로 쌓아두면 소금이 건조해진다고, 그렇게 숙성된 놈으로 음식을 하면 맛이 확실히 달라,” 어느 덧 밥 때가 다시 왔다. 화끈하고 활달한 성질답게 새빨간 조끼로 무장한 할매가 공양 간을 나선다. 말이 나온 김에 할매는 냉장고 깊숙이에 넣어둔 고춧잎김치와 고추절임이 담긴 통을 꺼내어 손으로 꾹꾹 눌러보며 간을 점검해 본다. 할매의 얼굴이 마침 잘 익었다는 흐뭇한 표정이다. ‘숙성’은 사람이나 음식이나 그 맛의 깊이를 좌우하는 모양이다. 할매의 걸진 입담만큼이나 기운 생동하는 손맛이나, 플라스틱 통에 보란 듯 담겨진 고춧잎김치와 고추절임의 자태가 언뜻 보기만 해도 그 맛의 깊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그런데 할머니, 고추절임을 할 때 소금물은 어느 정도로 짭짭해야 되는 거예요? 가령 저기 바가지로 물이 한바가지라고 치면 소금은 밥숟가락으로 몇 숟갈 정도 넣어야 하죠?” “이런 육시럴! 그런 걸 숟가락으로 어떻게 넣어, 바가지로 퍼부어야지, 기냥 한 솥 물을 때려 놓고 소금을 몇 바가지 부셔서 내둘리며 짭짭하면 되는 거지. 그걸 어떻게 말혀, 사람이 먹을건디 너무 짜도 안 되는 기고, 대충 그렇게 해서 팍팍 끊이라고!” 소금의 농도를 가늠하기 위해 던진 질문에 할매의 핀잔을 바가지로 먹고 보니 “이젠 기력이 쇄해 ‘욕쟁이 할매’라는 별명도 옛말”이라던 주지스님의 생각은 그져 예측 이었을 뿐, 하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직도 건재한 할매의 팔팔한 입담과 기운으로 구룡사의 공양간은 앞으로도 든든할 터이니......... 여성불교 2011년 1월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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