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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언가 하려는 것들이 다 좋은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가꾸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을 하다보면 그것이 다 그런 연유에서 나온것이구나라는 귀결은 나오지만 마음은 이것은 아닌데라는 데에 미치면 역시 저는 사회성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미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디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역시 부처님께서 고라고 말씀하셨듯이 어려운 문제인가 봅니다. 삶이 무엇을 향해 나아갈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러한 고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면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가까이 가보면 시기심과 부러움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이것이 곧 다음 관음제일에 법문에 사용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지요. 장안사 법문에 언급을 하였지만 역시 수박 겉이 아니였나 합니다. 이제 반야심경 강의가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러분 반야심경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불교행사에도 독송을 한다는 것과 270자 밖에 되지 않은 짧은 글귀 속에 불교의 심원한 철학이 잘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불교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경전들 중에서 반야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하는 것이지만, 반야심경을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점검을 하는 그런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계열 종교를 타력적 종교라고 합니다. 곧 신에게 매달리고 신의 힘과 은총을 희구하여 모든 것들을 해결하고 동시네 신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헌신을 강요합니다. 신에게 헌신하고 복종하면 행복이 되고 그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 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자력(自力)을 강조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힘에 헌신하고 매달리고 의지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과연 인간이 남이나 다른 존재의 힘 곧 타력만을 구할 경우에 참다운 행복과 깨달음이 생겨날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중심에 둔 채 의지하고 매달리면 점점 더 중생의 자리로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나의 욕심으로 기도하고 나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면 언제까지나 중생의 세계를 맴돌고 윤회할 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아무리 신에게 기도하고 헌신할지라도 근본 괴로움을 해결하여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된 해탈을 이루고자 혼자 정진하신 것입니다. 신을 비롯한 바깥의 모든 것에 의지하지 않고 안으로 찾아들어간 것입니다. 밖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진짜를 향해 스스로 찾아들어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도의 길을 주장하신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체득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가 일으키는 번뇌 망상에 대한 집착을 떠나면 체득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모든 중생이 다 갖추고 있는 부처의 지혜와 덕상을! 이렇기 때문에 타력에 의지하여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노력하여 자각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곧 해탈을 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즉불... 쉽게 이야기하면 마음이 곧 부처라네. 네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내가 부처 마음이 부처 이것이 불교의 시작입니다. 스스로 새기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어떻습니까? 확신이 생겼다면 공부하기가 쉽고 공부가 많이 된 것입니다. 자력으로 자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각을 하는 이들은 남 따라 공부하거나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적절한 한 가지 공부를 꾸준히 닦아가 즉심즉불을 체득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그것이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꾸더라도 남 따라 바꾸지 말고 내가하는 공부를 꾸준히 하다가 향상의 새 인연이 다가오면 그때 공부방법을 바꾸면 됩니다. 염불 주력 참회 보시 인욕 관법등을 통해서 체득할 수도 있고 반야심경 금강경 유마경등의 여러 가지 경전중 하나만 열심히 공부해도 체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반적 표현으로 자연히 삶이 다르게 변하고 궁극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했습니다. 바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며, 중생이 부처라고 하신 것입니다. 둥근원을 하나 그려봅시다. 이 원을 마음이라고 할 때, 깨달으면 원 전체가 부처요 밝음이 되고 깨닫지 못하면 원 전체가 중생이요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깨닫느냐? 즉심즉불. 마음=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으면 중생심(衆生心)이 그대로 불심(佛心)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왜? 원래 부처와 중생은 한마음(一心)이 어떻게 있느냐에 따라 구분된 것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신 그날까지 즉심즉불을 깨달으면 원래의 일체지 자연지 무사지(無師智)가 발현되고 부처가 된다는 것을 가르쳤지 신이나 남에게 매달려는 타력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열심히 공양물을 바치면 복을 많이 받게 된다. 나에게 절 많이 하고 나를 위해 봉사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나를 의지하고 헌신하며 살아라. 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자력의 길, 자각의 길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전제 속에 우리는 반야심경을 공부해야합니다. 이 반야심경은 대승경전의 초석이 되는 반야계경전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정 친근한 경이며 또 대승불교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경입니다. 남방(소승)경전(아함경)에서 자타카이야기(본생경)등을 지나 불교사상이 어떻게 대승불교사상으로 발전되어 왔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반야계경전 중의 반야바라밀다심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승불교 흥기 이전에 있어서의 불교와 그 이후의 불교 발달 과정을 사상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반야바라밀다심경의 경명(經名)과 이 경의 대승경전으로서의 위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교가 어떻게 해서 인도의 토양에 침투해 갔고 또 그것이 500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어떻게 해서 대승불교로서의 역사상에 나타났는지 그 발자취에 대해서 우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이 베라네스의 근교에서 전에 함께 고행한 적이 있는 다섯 사람의 사문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시작한 후(초전법륜) 구시나가라에서 입멸할 때까지 45년 동안 전도 생활을 함으로서 부처님의 교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입니다. 부처님의 교화는 간지스강 연안을 따라 동남으로는 라아자가하로부터 베사리, 가필라바스투를 거쳐 서북쪽 사밧디에 이르는 600킬로미터에 걸친 넓은 지역이었고 이것이 불교 교단의 활약한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재세 중에는 교단의 통제자는 아니였습니다. 부처님이나 그의 계율은 교단의 초석이 되기는 했지만 개개의 사례의 심판이나 결정은 각각 당해 구룹 안에서 처리되었고 부처님 자신이 고압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교단이 분열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도 부처님은 권고자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로마카톨릭 같은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점이며 불교 교단 본래의 모습으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만한 일입니다. 최후의 결정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는 확신이 불교의 기조를 이루워 왔기 때문에 부처님 재세 시에는 원칙적으로 그의 명을 어기는 자가 없었으므로 교단의 통제는 비교적 용의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교단은 북인도의 광활한 지역에 산재해 있었으므로 중앙의 기관이나 횡적 연락기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입멸 후에는 당연히 분파현상이 있고 분열 현상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예상이 되어온 바였습니다. 부처님의 후계자로서는 마하가사파(대가섭)가 지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정신적 상속자라는 의미이지 교단의 통제자로서의 상속자는 아니였습니다. 마하가사파와 마찬가지로 다른 제자들도 또 자기 제자들을 기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교세를 넓혀간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경전은 언제부터 이루워졌는가. 원래 부처님의 설법은 듣는 사람의 능력이나 입장에 따라 가장 적절한 표현을 쓰는 것이 특색인데 부처님의 교설은 어떤 특정 기회에 특정한 인물들을 상대로 그때 그때 행해졌던 것입니다. 언제나 상대를 눈앞에 두고 가장 유효한 방법으로 교화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개개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의 무리들을 상대로 할 적에도 그들의 능력이나 입장을 존중하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설법이라 하여 전해 내려오는 것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무리 또는 개인에게 설법한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이 설법한 말은 제자들이나 신자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문자가 있었지만 종교나 문학은 문자로 옮기지 않고 기억력에 의해 많은 설법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이미 문헌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아야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제세시에는 아무도 그런 문헌을 편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어떤 의문점이 있으면 부처님을 직접 만나 물어보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기억이 정확한지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서로 의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입멸 후에는 스승을 만나 물어 볼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버려 문제가 생기고 그래서 기억을 문자화 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리해서 부처님의 유훈을 편집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할 것을 제의한 것은 대가섭 이였습니다. 그는 500사람의 유능한 비구들을 선정해서 라자가하 근교 칠엽굴에서 편집회의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제 1차 결집입니다. 율에는 우바리존자 경에는 아난다존자가 책임자로 선정되었고 그들이 암송하는 본문을 출석자 일동이 함께 검토하고 이것을 교단의 이름으로 성문화 했습니다. 또 딴 모임들도 있었습니다. 마하가사파가 주재한 결집에는 참가자가 500비구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지방의 교단에는 전달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집의 결과 생겨난 성문화에 대해서 승복하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 제1 결집은 마하가사파, 아난다, 우바리 이 삼거두에 의해 이루워졌는데, 이 계통이 불교의 정통파(상좌부)가 되었으며, 현재 실론 등지의 남방불교는 이 정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들입니다. 칠엽굴의 결집에 참가하지 못한 비구들이 따로 모여 개별적으로 또는 그룹을 이뤄 각자 자기들의 기억에 따라 율이나 경을 자기들 나름으로 확인하고 고쳤으리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또 지방적 분파도 있었고, 부처니 재세시에도 교단의 지방적 분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입멸 후에는 분파적 경향이 한층 성행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칠엽굴에서의 결집은 확실히 하나의 큰 성과를 거두었고 동시에 딴 분파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칠엽굴이있는 라자가하는 부처님의 선교 활동 초기부터의 지반이었고, 최초로 부처님에게 귀의한 빈비라라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었는데 그의 아들 아자다삿두왕은 부왕 만큼 불교에 열의가 있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다른 여러 국왕들처럼 모든 종교를 보호하고 후원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고살라 왕국이 멸망한 후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던 라자가하(王舍城)를 회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마하가사파 등 정통파의 권위를 과시하는데 적합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지방에도 문화적 중심지가 몇 군데 있었는데 부처님이 활동했던 지역 동부에서는 베사리 서부에서는 사밧디 또 아요도야나 고삼비 등지에서도 모두 독자적 기풍을 갖는 교단이 번서해 갔습니다. 이리하여 원래 중앙집권적 세력을 갖지 않았고 또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던 불교 교단이 시류에 따라 몇 개의 분파로 갈라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상좌부는 스스로 정통파임을 자임했으나 모든 종교사가 그렇듯이 정통파가 반드시 최고의 전통을 충실히 전달하고 있다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전통을 보존하려 하는 노력이 도리어 전통을 왜곡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진보파(大衆部)는 시대의 진운에 민감했지만 그대신 내부 분열의 위기를 내장(內藏)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상적 전개는 이런 경향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찌되었건 부처님 입멸 후 약 500년 동안은 현저한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돌아가신 스승의 유훈을 지키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의 고장에서 신중하게 교단생활을 계속해 왔으리라 보아야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각 그들의 고장에서 그들 자신의 독자적 기풍이 형성되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부처님 입멸 후 100년경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때 두 가지 사건이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베사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고살라국에 살고 있던 장노(長老) 야사(Yasa)는 베사리의 제자들이 계율을 바로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권위자 700인을 베사리에 모아 계율의 각조(各條)를 재확인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위반하는 제자들을 견책했습니다. 그때 베사리의 제자들은 융통성 있는 해석을 내리기를 좋아했는데 아난다의 정통을 이어받은 야사일파는 이것을 위법이라고 탄핵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700결집이라고합니다. 그러나 이때 새 성전이 편찬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시 부처님 입멸 후 100년경에 마하대바라는 승이 마가다국의 수도 파다리푸트라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고 사설(邪說)을 제창하며 바른 불교를 더렵혔다는 말이 널리 떠돌았습니다. 마하대바에 대한 이러한 비방은 종교적 반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어 이것을 사실에 비추어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마하대바의 출현은 불교 교단을 상좌부와 대중부로 크게 나누게 된 직접 동기가 된 것만은 확실한 일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뉜 것이 불멸 100년경인데 100년이라는 세월은 세 세대에 해당되는데 세월이니까 첫 세대의 사람들의 기억이 엷어지게 된 시기에 해당되며 그래서 이 시기에 분파 활동이 성행했을 것은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누어진 것도 유사한 사건들의 한 전형에 불과 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한편으로는 공식주의(公式主義)로 모든 세칙을 엄수하는데 필사적인 사람들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불교의 정신을 대국적으로 살려 가는데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상좌부와 대중부라는 대립적 분파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결국 전자(보수파)는 인간으로서 80년간 생존한 석가모니부처라는 데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경모숭앙하는 태도를 취한데 반해 후자(이상주의자)는 불타를 이상의 권화로 보고 인간 부처님을 통해서 영원한 부처님의의 이상상(理想像) 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있었지만 다른 종교단체에서 보듯이 피로 피를 씻는 심한 항쟁은 없었으며 각각 자기들의 길을 걸어감으로서 불교는 점차 인도의 토양에 깊이 침투해 갔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일과는 별도로 불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는 커다란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입니다. 부처님 입멸 후 1세기 반경이 지나 북인도는 세계 역사상 특기할만한 일대 사건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기원전 334-325년에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석권하고 이어 이란, 서 투르키스탄과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을 정복한 일입니다. 그것은 이에 앞선 아게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제국에 의한 침입의 후속 사업이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인도 침입은 군사적으로는 실패였으며 정치적 영향도 크지 않았습니다. 인도인 대부분은 이 정복에서 거의 아무 영향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정복 때문에 인도의 서북 국경이 서방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리하여 이것이 불교발전에 중대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입의 중요한 의미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활동한 중심지 마가다국에서는 아자다삿두의 치하에 있었던 불타부처님의 만년 교세가 더욱 더 융성해졌습니다. 왕은 서방의 강대국 사랄라를 격파하고 수도를 라자가하에서 파다리푸트라로 옮겼으며 간지스강 북안지역도 손에 넣었습니다. 그후 아자다삿두의 왕자 왕손이 뒤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마가다국은 난다왕족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 무렵의 역사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좌우간 왕조는 변해갔지만 마가다국 자체는 발전 일로를 걸어갔습니다. 이 난다왕조를 쓰러뜨리고 마우리야왕조의 기틀을 잡은 것이 찬트라굽타인데 그는 알렉산더 왕 침입 후의 인도 세력 회복기에 그 여세를 타고 대제국을 세우는 찬스를 잡았던 것입니다. 그는 알렉산더가 인도를 공략하던때 대왕과 회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건 어쨌던 알렉산더 왕은 인도에서 전과가 오르지 않아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가서 부득이 철했으며, 그후 판잡지구에 그리스인 총독을 남겨놓고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더는 바빌론에서 병으로 죽습니다. 같은 해 가을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인도인들은 외국 주류군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것을 일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인도 해방군을 지휘한 것이 젊은 왕 찬드라굽타입니다. 난다왕조는 이미 멸망한 뒤여서 찬드라굽타가 마가다의 국왕이었는데 마가다국은 이미 동쪽으로는 간지스강 서쪽으로는 인더스강에 이르기가지 북인도를 거의 전국토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찬드라굽타는 종교에 대하여 우대하지도 탄압을 하지도 않은 정책을 폈으며, 그의 아들 빈두사라가 20년 제위에 있었으며, 그는 선대의 위업을 계승 서시리아 그리고 여러 나라와 교류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624년에 아쇼카가 파다리푸트라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습니다. 그것이 불멸 후 200년경이었습니다. 아쇼카왕은 소년시절부터 성질이 난폭하여 부왕도 이것을 빙자하여 고의로 위험한 적지에 파견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즉위 후 13년 동안은 북인도 전역을 장악한 왕조의 3대왕으로서의 평화를 구가하고 사치한 생활을 계속했다. 하지만 벵갈만에 접한 가링가를 공략한 것이 전부인데 여기에서 일대 전환이 일어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가링가는 6만의 보병, 1만의 기병, 7백마리의 전상(코끼리부대)을 배치하고 모험심이 강한 해병을 가지고 있는 나라여서 맹렬한 저항을 했다고 합니다. 정복자 아쇼카왕의 말에 의하면 15만의 포로 10만명의 죽음 기아와 페스트가 전쟁뒤를 이어 일어나서 한층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무서운 희생은 대승리의 대가로 치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는데 이 전쟁이 아쇼카왕으로 하여금 무력에 의한 정복을 단념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데, 이때 불교의 위치는 별다른 지지자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200년 동안 충실히 지켜온 세력의 뿌리는 놀랄만치 강한것 이였다. 그때까지 불교는 수도에서는 유력한 종교 세력이 되지 못했는데, 지방에서는 더 깊이 뿌리박은 불교라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던 것이다. 아쇼카왕의 아픈 마음을 의지하는 것으로 불교가 대두되자 불교는 국가적으로 공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불교의 찬란한 문화가 세계적으로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분파적 경향이 조장된 것도 사실이었다. 불교가 지방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 때에는 지역적으로 다른 분파가 있어도 그리 눈에 뛰지 않았지만 불교가 중앙으로 진출한 이후에는 정통파 비정통파로 분열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였을 것이다. 부파적 대립이 표면화 됨에 따라서 종교회의를 열고 교단의 규율이나 성전의 구성을 재확인하여 재음미할 필요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였으며, 이로 인하여 제 3결집이 이루어졌다. 결국 아쇼카왕의 집권과 귀의로 불교는 비약적 발전과 2000년의 불교의 토대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대승불교가 전개되게 된 몇 가지 계기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이후의 불교가 어떻게 인도에 전개되어 갔는지를 대략 살펴보았습니다. 부처님의 교법은 경건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인욕 정진으로서 봉행되었고 전도되어 갔는데 특히 아쇼카왕의 전도 정신에 의해 부처님의 교법은 마우리야제국을 넘어 널리 서방 세계에까지 유포 되었던 것ㅇ비니다. 그러나 여러 지역으로 퍼저감에 따라 지역적으로 다소 다른 성격을 뛰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이 여러 가지 분파적 경향이 대두되게 된 여러 가지 원인일 것입니다. 특히 서북인도나 남인도의 변경에서 전개된 불교는 눈부신 바가 있는데 살펴보면, 1, 남방 안드라왕국에 있어서의 바라문교와 더불어 불교도 융성했고 종교에 대한 관용적 입장에 있었던 그곳에서 대승불교 정신이 흥기되었던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2, 다음은 산스크리트가 성전어로 된 곳에서 세상에 난 아슈바고샤(마명(馬鳴))가 산스크리트어로 여러 저작을 남겼는데 이것이 불교와 인도의 고전문화, 바라문교가 서로 협조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고, 폐쇠적 승원불교가 인도 민중의 불교로 발전되어 개방된 종교로 되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 전개의 계기 중의 하나라고 보아야겠습니다. 3, 또 더주목해야 할 것은 끊임없이 이민족이 침입해 들어온 서북 지역에서의 일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사례는 그리스 정신과의 교섭 융합함으로서 아폴론불이 조성되고 거기서 동양 전역에 대승불교가 전파되어 불교 유전사(流傳史)의 본류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4, 또 그리스인 침입이후 기원전 100년경부터 기원후 75년 경에 걸쳐 살가와 파후라바 즉 스키타이인과 파루치아인이 또 인도에 침입해 들어왔는데 그때 그들은 메시아의 희망 천국 태양(미트라)과 광명의 제의(祭儀), 신비적 우주 구성론의 정열 등을 인도에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전파되어 감에 따라 그 내부에서 메시아로서의 미륵(彌勒) 극락정토(極樂淨土) 광명의 여러 신으로서의 아미타불 관자재 관세음 직관 등이 생겨났습니다. 이것들은 대승불교로서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 들입니다. 즉 무한의 사색에 의해 생겨난 거대한 신화가 고대 신앙의 좁은 기반위에 구축이 된 셈인 것이죠. 앞서 아소가왕 치세하에서 정통파(상좌부)와 비정통파. 진보파(대중부)라는 분파가 생겨 표면화 되었다고 했는데 정통파라는 것은 부처님의 교설을 그대로 준수하고 그대로 실천해서 부처님의 행적을 사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쇼카왕의 왕자 마힌라가 못가리푸타 딧사를 스승으로하여 출가해서 기원전 3세기에 부왕의 명에 따라 실론도에 전도하여 실론불교의 기틀을 잡앗는데 그 유파가 지금 리안마, 샴, 캄보디아 등지의 소위 남방불교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데라바다 불교(장로불교)로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런 경향을 뛴 것은 남방 여러 지구의 불교자들 뿐이 아니였습니다. 불교 교단군 중에서 서북지구 특히 캬슈미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불교(설일체유부) 등도 지금 말한 데라바다 불교도들과 같은 경향을 띈 부처님에 대한 숭앙자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불타 설법의 언교(言敎)를 성교(聖敎)로서 중요시하고 그 언교가 나타내는 대로 모든 것을 신봉 이해 해석하여 규정하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이해 해석 규정 등에 어긋나는 이해나 해석은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 폐쇄적인 전통주의자적 태도를 견지한 것입니다. 그 유파의 태도는 엄격한 학문적 양상을 형성했기 때문에 서양의 불교학자들은 그 학풍을 서양중세의 그리스도교회에서 행해진 철학과 비교하면서 불교 스콜라철학이라고도 합니다. 그 학파의 업적에 따라 불타의 언교가 모두 엄격한 의미로 규정되어 말의 유별이 명료해졌으며 불타의 언교가 사상적으로 체계화되었는데 이것은 이들의 커다란 공헌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번잡스런 학문 연구에만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여 사회 교화라는 종교 활동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 흠이었고 이것이 그들을 소승불로로 떨어뜨린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번잡스러운 철학적 경향에 대해서 이것을 시정하고 불교 본래의 입장으로 돌아가 혁신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 대승불교라는 동향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전통주의자 즉 머리가 굳은 번쇠철학자류에 대해서 대승불교 쪽은 말하자면 자유주의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전자가 교단주의 출세간 주의라면 후자는 세속 세간을 그대로 허용하는 재가불교적 색채를 띈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대승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그런 재가 불교적 경향은 반드시 출세간 주의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인간 그 자체의 무한한 역사를 똑똑히 보고 불타의 정각이 인간 세계에 현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타정신의 원(願), 인간구제의 자비, 본원(本願)과 같은 동향이었다. 대승자는 그 본원을 되풀이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기술했다. 여기에 대승 경전이라는 것이 역사상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대승 경전이란 그러므로 불타의 본원이 인간에게 인상지어진 인상 기록인 것입니다. 어떤 대승경전도 원시 경전과 마찬가지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시아문이란 교주 석가모니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말인 것입니다. 원래 대승경전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불멸 후 수백년의 역사가 지난 다음 기술된 것인데, 기술자는 그때 그 환경에서 불타의 정신을 그대로 배승(拜承)했다는 생각에 넘쳤으리라. 불타의 정신은 그런 역사적 성격을 띄면서 마음을 통해 유전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불교 유전사의 종교적 성격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교단주의자들이 불타의 교설을 그대로 존중하는데 그치지 않고 방대한 대승경전을 기록하여 역사 위에 인간 세계의 언어로서 기록하여 텍스트로서 남겨놓았습니다. 이 일은 석가모니 불타의 정신이 교단주의자들의 사상 영역을 훨씬 뛰어넘어 넓은 영역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침투해 들어갔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운동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일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대승경전 중에서 대승불교의 교리의 기본을 설하고 사상적 입장을 확립한 공적은 기원전 1세기 경에 서립된 반야경(般若經)에 돌려야 할 것입니다. 반야경은 남에서 일어나서 북쪽으로 번져갔다고 경전 자체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반야경을 대승불교 사상으로 체계화하고 대승불교를 개혁한 시조 나가르주나(용수)와의 관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바라문교와 불교가 공존했고 사상적으로 포용서이 강한 곳이었던 남인도의 안드라에서 출생한 사람입니다. 나가르주나의 주 저서인 근본중론(根本中論)에서는 보수파로서 가장 유력했던 카슈미르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결점을 논리적으로 폭로하고 바른 불교를 현시하려고 했습니다. 바른 불교란 그에 의하면 불타의 정각의 본질인 연기의 도리를 바로 보는 정견(正見)이었습니다. 모든 개념적 규정은 그 자체 속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연기의 도리에 서서 그 개념적 규정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그 근본적 입장은 무소득 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무소득 공이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이렇게 남방출생인 나가르주나가 서북지구의 설일체유부를 비판하고 반야바라밀다의 도리를 개현 곳에 반야경 사상이 인도에 흥기한 까닭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반야경은 남에서 일어나 서북으로 번져갔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반야경이 인도 불교에서 유행하게 된 이런 동향을 학자들은 종교 개혁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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